1998년 7월 26일
행복과 평화는 어떻게 얻을 것인가?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평화를 원한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옛부터 많은 가르침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진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진리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도(道), 법칙(法則), 약속(約束) 등이 진리(眞理)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들입니다.
진리란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길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도덕(道德)이란 올바른 행동이 큰 덕을 쌓는다는 뜻입니다. 옳은 행동을 실천하는 길 혹은 옳은 삶의 길, 바로 도는 길입니다. ‘진리’도 길이고, ‘도’도 길이고, ‘법칙’도 어떠한 현상을 존재하게 하는 길입니다. 약속도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킬 것을 지키지 않으면 행복과 평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평화는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존재하게 됩니다. 특정한 조건이란 정의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을 의미합니다. 밝은 세상에서 밝은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진정한 평화가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불행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 때 삶 속에 평화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이런 일을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는 단지 사람들의 이상 속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들고 불안하니까 평화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평화가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밝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조건을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궁핍해서 배고픈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 됩니다. 내가 근면 검소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겠죠? 그렇게 되면 좋은 친구 즉 도반을 얻어서 외롭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도반들과 서로 의지하고 축복을 나눈다면은 외롭지 않은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근면함과 검소함 그리고 정직함이 행복을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근면하고 검소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행복을 얻지 못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가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경우에 따라서 어떠한 뜻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이 어두우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완전한 어두움에 갇히면 그 좋던 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어두운 세상에서 살게 되면 장님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근면과 검소와 정직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평화와 행복은 이상 속에 존재하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평화나 행복은 여러분들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평화나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이런 일을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겠다고 온갖 어리석은 일들을 행해왔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어떤 길에 있는가를 모릅니다. 어떤 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모른다면 여러분들이 바라는 목표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설명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삶의 중요성과 진리 속에 있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 속에 있는 일들을 알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TV 토론회에서 『정리해고 이런 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제학 교수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한참 떠들었는데 모르는 소리를 계속해대고 있었습니다.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혹은 하면 안 된다’라는 말들로 서로 물고 늘어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리해고가 아니고 일하고 싶은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는 누구나 쉽게 일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모든 국민이 재벌이 경영하는 회사에 얽매여서 살아가는 체제나 발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개인의 삶의 문제들을 국가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통치자가 모든 개개인의 삶을 해결할 수 없고, 통치자에게 4 천만이 넘는 국민들의 생존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이 통치자들의 손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 땅에 행복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일시적인 편안함을 갖게 될 때, 혹은 많은 물질을 갖게 될 때 혹은 자신이 동경하던 이상을 성취하게 될 때, 순간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한가지 예를 살펴 봅시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불쌍하다고 5천 원을 준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까, 동정입니까? 그것은 인정이고 동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은 축복이 될 수 있는 일을 말합니다. 5천 원으로 가난한 자를 대접하는 것은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정이나 동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동정이나 애정은 사랑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 한 것처럼 일시적인 만족을 얻는 것은 행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해서 귀국했을 때 받은 열렬한 환영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마음이 붕 떴다고해서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축구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했다고 해서 어두운 마음이 밝아질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축구를 배우면 됩니다. 골프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근면하지 않기 때문에 검소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밝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감정과 같이 자신 속에 있는 것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은 결코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점점 불안해질 뿐입니다. ‘인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이제 나 정상인데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항상 걱정과 두려움에 쫓기며 살게 됩니다. 이런 것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는 이상을 쫓으며 그 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와 대화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의 이상에 동의를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날 우리 사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의 그릇된 이상에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교회나 절 어디든지 가면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선생 소리를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내가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와 같은 입장이 한 번 되어보세요. 여러분들이 수학에 능통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무지한 자가 나타나서 5 더하기 5의 답이 100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동의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문제입니다. 모르면 동의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5 더하기 5의 답이 100이라고 들으면, 나는 오늘 좋은 걸 배웠다고 하면서 맞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학을 뻔히 아는 자의 입장으로서는 틀린 답을 맞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 답은 맞지 않고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정정해주면 무지한 자들은 얼굴이 시뻘개지고 숨을 쉭쉭거립니다. 상대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욕보인 나쁜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네가 하는 말에 동의를 해 주었으면, 너도 내가 하는 말에 동의를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식의 사고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환경의 조성이 구성원들이 행복과 평화를 얻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조성된 일자리가 많이 제공되어야만 크게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그런 일자리를 통해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좋은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검소한 생활을 해서 삶의 보람을 쌓아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TV를 보다가 대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기가 막혀서 환멸을 느꼈습니다. 도대체 교수라는 사람들은 다 저런가?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농사꾼들한테 가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물어 보면 그 사람들의 말은 이치에 맞습니다.
“이 씨앗은 냉동창고에 넣어서 기온을 낮추어 주면 겨울로 착각하고 잠을 잔다. 이 씨앗을 땅에 심으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봄으로 착각하고 싹을 틔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수라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는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회의 환경 탓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는 존재하고 있는 일들을 먼저 살펴서 그 일들이 왜 잘못 되었는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진찰을 하지 않고 투약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먼저 진단을 한 다음에 처방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에 대한 진단이 수행되지 않습니다. TV에 나온 교수들은 문제를 진단하는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고 이상한 소리만 해대고 있었습니다. 한 교수는 옳은 말을 한 다른 참가자를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온갖 헛소리를 꿰어 맞추면 옳은 자가 하루아침에 나쁜 자로 매도되어 결국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위독한 환자가 왔는데 ‘너는 곧 일어난다. 용기를 가져라. 일어나라.’라고 말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가하고 진단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교육의 참 목적은 인간에게 존재하고 있는 일들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알리는 것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일 속에는 항상 옳고 그름이 존재합니다.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존재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만약 교육이 존재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의식의 눈을 뜨게 해주지 못한다면 그 교육은 실패한 교육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재벌 주도의 경제 구조 하에서 어려움에 빠진 것은 잘못된 교육에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은 저임금에도 공장에서 일을 잘합니다. 중학교 졸업장만 가진 사람들은 짜장면 배달도 잘 하고 야채 장사도 잘하고 농사도 잘 짓습니다. 문제는 고학력자들입니다. 고학력 자들은 머리를 굴리는 일 외에는 잘 안 하려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의 세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고학력자들은 재벌 회사들만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왜 남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모든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면 국가는 사회 내에서 공정성만 제대로 유지시켜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사회 속에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행복과 평화가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행복과 평화를 얻는 실질적인 길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뜻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뜻은 법칙이고 진리이고 약속이고 도다. 우리는 이 뜻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이 뜻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다.”
이 순신 장군이나 을지문덕 장군은 나라가 외침을 당했을 때 나라를 구하는 큰 공을 세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끝없이 숭배하는 것으로만 세월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국민 스스로가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카네기는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세계의 강철왕이 되어 큰 부를 갖게 되었다.’ 이거 좋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책을 통해서 단지 그를 동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카네기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육은 이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을 카네기처럼 만들어야 합니다. 꿈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을지문덕과 같은 맹장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가장 중대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몇 십 년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 시대가 옳은 것을 버리고 그른 것을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옳고 그름에 대해서 눈을 떠서 스스로 그릇된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왜 그릇된 일을 멀리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일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절대로 타인에 의존하고자 하는 나약한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불안정합니다. 이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없는 것은 사회환경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쩌다가 실수로 도박판에 앉게 되었는데 몇 번 해보다 안되면 일어나야 합니다. 도박판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거든 언제든지 일어나야 합니다. 만원을 가지고 가서 9천 원을 잃었다 하더라도 본전을 찾겠다고 그 마지막 천 원까지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천 원을 들고 일어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도박판에서 천 원을 땄다. 만약에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천 원을 날리게 될 것이다.’ 자신이 잘못된 곳에 빠졌다고 생각한다면 즉시 거기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사회의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면 과감히 그 구조를 고쳐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잘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국가의 행복과 평화를,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를 멀게 만들고 있는 원인입니다.
‘지혜는 삶에서 중요합니다. 지혜는 누구를 위해서 필요로 합니까? 지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일에 눈을 뜨면 내 스스로 잘못된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를 빛내고 국가를 빛내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생애를 통해서 사람들의 정신을 올바르게 깨운다면 후세는 분명히 나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자연의 가르침」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합니다.
“페이지 수도 얼마 안되는데 3000원 씩이나 하느냐? 다른 책들은 훨씬 많은 페이지 숫자에도 2000원 밖에 안하는데.”
내가 하는 말은 그렇습니다.
“그런 책들과 이 책은 다르다. 이 책 속에는 진실이 있고 길이 있다. 이 책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을 할 수 없다. 안 팔리면 창고에 쌓아두어라.”
인건비 외에도 대략 300만원 적자를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의 일들을 알면서도 세상에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살아야 합니다. 만 권의 책을 출판해서 그 만 권 중에 한 권이 길을 찾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서 그에게 밝은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먼저 자기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남을 축복하기 위해서 즉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왜 남을 사랑해야 하느냐고 질문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땅에 거름을 주는 일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내가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 때 땅은 나에게 좋은 열매를 선물해 준다. 내가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깨우치고 축복하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환경을 좋게 만들어 놓으면 그 축복이 더 큰 축복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고 고통스러워도 나는 결코 그 손해 때문에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다른 사람들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 삶의 목표가 우리 자신을 축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항상 현명한 판단과 활동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지혜로부터 멀어져서 존재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처음엔 사소한 실수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실수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항상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옳고 그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배우고 깨달으라는 말을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간단하게 여러분들의 이해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끝을 내겠습니다. 질문.
질문자: 축복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에서 축복이란 지키고 행하는 일이 농사일과 같다고 되어있습니다. 지키라는 것은 무엇을 지키라는 의미입니까?”
세상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기본은 지키고 행함에 있습니다. 농사 일에서 적기에 씨를 뿌리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세상의 일도 똑 같습니다. 적기에 씨를 뿌려야 하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지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린 후 가꾸는 방법을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 행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적기에 파종을 하고 적기에 약을 치고 적기에 김을 매고 적기에 추수를 해야 만이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지키고 행하는 일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약속을 할 때 그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약속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지키는 것이고, 내가 행동하는 것은 행하는 일입니다.
최부군 : 아까 지킬 것을 지키지 않으면 행복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지킬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재물이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오히려 정신이 어두워지고 불안정해집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좋은 친구를 의미하는 도반과 거짓을 말하지 않는 밝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근면, 검소, 정직을 지키는 자 만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평화는 아무 원인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밝은 사회에서 밝은 마음을 얻어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삶의 보람이 분명해야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자신이 한 일이 축복으로 연결되는 보람이 있을 때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수확을 얻는다면 자신을 매우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키고 행함이 있을 때 거기에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다시 질문. 없으면 뭐 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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